Ragtime
래그타임
뮤지컬 래그타임은 역사적 장면을 재현하는 대신, 서로 다른 삶들이 축적되며 국가를 형성해 가는 살아 있는 역사를 제시한다. 절제된 무대와 명확한 연출, 배우들의 강 력한 존재감 속에서 이야기는 파편처럼 이어지며 자연스럽게 의미를 쌓아간다. 이 작품은 비평을 요구하기 보다는, 관객에게 목격자가 될 것을 요청한다.
REVIEW
래그타임은 묵직한 감동을 느끼며 침묵 속에서 보았다. 공연 후 시간이 꽤 지났지만, 무대 위의 이미지와 목소리, 그리고 이 작품이 지닌 도덕적 무게는 여전히 마음을 누른다. 래그타임은 줄거리를 요약하여 설명하기에 어려울 정도록 복합적이고 큰 주제를 던지면서, 무대 위 인물들이 그 시대를 살던 존재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래그타임은 역사적 스펙터클을 다루는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은 ‘살아 있는 역사’를 다룬다. 미국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외부인으로서 그 맥락을 충분히 체화하지 않은 채 작품을 요약하는 일은 무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은 2차원적인 몇 마디의 글로 요약되기를 거부한다. 작품의 힘은 등장인물과 사건의 파편적인 축적에 의해 형성된다. 서로 다른 삶들이 독립적으로 등장하면서도 교차하고 스치며, 결국 그들이 살아가는 나라를 형성해 나간다.
구조는 처음에 에피소드 중심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우리가 세상을 실제로 경험하는 방식과 닮게 구성되어 있다. 나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내 앞에서 사람들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나는 공유한 기억의 파편을 모아 만나온 사람들에 대한 인상을 축적하는 셈이다. 이 작품의 에피소드는 파편처럼 보이지만 단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지극히 자연스럽다. 관객이 의미를 스스로 조립할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에피소드를 나열해서 보여준다.
오프닝에서 두 소년을 제외한 전 출연진이 무대 아래에서 거대한 승강장치를 통해 합창과 함께 등장하는 장면은 선언과 같다. 인물의 등장은 그들이 역사를 꾸미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지탱하는 구조체 자체임을 보여준다. 하나의 사회가 우리 눈앞에서 문자 그대로 형성된다.
이 효과를 가능하게 하는 핵심은 무대 연출이다. 배우들은 여러 장면에서 옆이나 뒤로 사라지기도 하지만, 무대 양옆의 전면 계단을 통해 등장하고 퇴장하며, 관객과 같은 공간에 머문다. 높낮이가 있는 구조물은 권력과 노동, 기억을 수직적으로 보여준다. LED 배경은 절제되어 사용되고, 많은 소품은 기계장치 없이 직접 밀어 움직인다.
조명 역시 세심하다. 아버지가 북극 탐험을 떠나는 장면에서 그는 무대 뒤쪽 어두운 곳으로 사라졌다가, 이후 다시 빛 속에 등장하며, 타테를 미국으로 실어 나르는 배와 나란히 놓인다. 위에서 사선으로 떨어지는 대형 천은 불안정한 구름처럼 보이다가 성조기의 형상으로 정리되지만, 그것은 승리의 과시라기보다 잠시 세워졌다가 곧 접혀 사라지는 구조물에 가깝고 무정형이어서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이 무대 언어는 의미를 가리지 않고, 오히려 또렷하게 만든다.
비비안 보몬트 극장의 공간 역시 친밀함을 극대화한다. 반원형 앞무대는 배우들의 미세한 동작과 표정 변화를 온전히 전달하게 하며, 동시에 프로시니엄은 역사적 스케일을 담아낸다. 역사는 멀리 있지 않다. 바로 앞에 있다.
해리 후디니, 에블린 네스빗, 엠마 골드먼, J. P. 모건, 헨리 포드, 부커 T. 워싱턴 같은 실존 인물들이 초반부터 등장하며,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관객이 즉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공연은 매우 탄탄하다. 콜하우스 워커 주니어 역의 조슈아 헨리는 깊이와 절제를 동시에 지닌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의 노래는 힘을 과시하지 않고도 공간을 채운다. 피아노에 앉아 연주할 때 그는 자유로워 보이고 이완되어 있으며, 래그타임 특유의 싱코페이션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있다. 땀을 닦는 작은 동작 하나까지도 인물을 현실에 붙잡아 둔다 — 훈련된 존재, 지금 여기 살아 있는 인물로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노래를 둘러싼 극장의 전반적인 음향 설계다. 무대 아래에 자리한 오케스트라는 목소리와 경쟁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래에 맞춰 조율된 듯하다. 연주는 배우의 음성에 따라 적절히 조절되며, 호흡과 프레이징, 그리고 노래의 분위기가 장면에 맞게 변화된다.
사라 역의 니셸 루이스는 강한 성량을 지녔는데, 표정에는 늘 불안이 서려 있다. 콜하우스가 1막에서 웃는 장면을 자주 보여주는 반면, 사라는 거의 웃지 않는다. 그녀는 비관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현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두 사람의 화음이 아름다운 이유는 희망과 두려움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듀엣은 감미로움보다 결의가 먼저 전해진다.
브랜든 유라노비츠의 타테는 소설 속에서 걸어 나온 인물처럼 느껴진다. 딸 앞에서 그는 늘 경계하며 보호하고, 어머니 앞에서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워진다. 미세한 음색과 몸짓의 변화는 한 인간이 사회 속에서 성공하고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감독이 되어 스스로를 ‘공작(Duke)’이라 부르기 시작할 때 그의 과장된 태도는 공허하지 않고, 오히려 해방처럼 느껴진다. 어머니의 말버릇인 “Well”을 흉내 내는 장면은 패러디가 아니라 친밀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관객의 웃음을 이끌어낸다. 두 사람은 연인이 되기 전에 먼저 친구가 된다.
남동생 역의 아우어 브라더는 처음엔 방향을 잃은 존재처럼 보이지만, 노래는 처음부터 명확하다. 그의 목소리는 볼륨이 아니라 신념을 통해 힘을 얻는다. 목적이 소리를 무게 있게 만든다. 마지막에 그는 멕시코로 건너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대의에 합류하겠다고 선언한다.
케이시 레비가 연기한 어머니는 작품의 조용한 중심축이다. 남편에게 ‘남자보다 못한 존재’로 불리는 순간에도 그의 자세는 무너지지 않고,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가 사라를 돕는 이유는 이념 때문이 아니라 심장의 움직임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선택은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놀랍지만, 동시에 인간 내면에 잠재된 힘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거의 노래하지 않는다. 그들은 목격자이자 연속성의 상징이다. 타테의 딸은 그가 살아갈 이유가 되는 존재다. 그의 책임감은 딸을 깊이 사랑하고 그녀를 위해 어떤 일이라도 할 준비가 된 부성애로 드러난다. 극은 소년, 소녀, 그리고 사라와 콜하우스의 아들이 무대 중심에 서며 다음 세대를 암시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에필로그에서 인물들은 각자의 운명을 직접 말한다. 아버지는 RMS 루시타니아호에서 죽음을 맞았다고 말한다. 모두가 극이 끝난 이후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스스로 말한다.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뒤 1년의 애도 끝에 타테와 결혼해 세 아이를 키우게 되었다.
이 작품은 따뜻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리고 세기의 전환기에 놓인 이야기이기에, 할아버지가 “묘지로 은퇴했다”는 농담을 할 때 우리는 이미 등장인물 모두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래그타임은 극을 보고 감탄하며 평가하는 시선을 요구하는 작품이 아니라, 관객 모두가 목격자가 되기를 원하는 작품이다.
나는 이 작품 앞에서 경외감을 느꼈고, 그냥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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