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re-Dame de Paris
노트르담 드 파리
노트르담 드 파리는 움직이는 기념비다. 반복·곡예·신화로 쌓아 올린 시각미와 주제성이 돋보이고, 갈망·배제·권력을 다룬다. 음악을 넘어선 무용과 곡예가 성당을 인간의 힘으로 살아 움직이게 한다.
한국 초연:
2005
세계 초연:
1998
관람 년도:
2024
공연 극장명:
세종문화회관,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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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전통적인 뮤지컬을 기대하며 노트르담 드 파리를 보러 갔는데, 무대에서 만난 것은 훨씬 더 조형적이고 시적인 세계였다. 이야기를 따라가는 작품이라기보다, 반복과 곡예, 신화적 갈망으로 세운 감각의 기념비에 가까웠다. 감정의 굴곡이나 음악의 발전보다 주제와 무대미학이 앞섰고, 서사만으로가 아니라 시각과 탄력있는 안무로 관객을 압도했다.
무대는 눈부셨다. 기하학적 패널로 이뤄진 모듈형 세트는 성당을 닮았다—단단하고, 유연하게 움직이며, 거대했다. 아크로베틱한 댄서들은 밧줄을 타고 오르내리고, 종 안에서 인간의 타종추처럼 흔들렸다. 무대 스태프가 속으로 들어가서 밀어서 움직이는 탑 세트는 콰지모도의 외로움을 공간적으로 확장했다. 사각형과 우리(철창), 그리고 종의 둥근 형상이 맞부딪히며 구속과 공명이라는 주제를 시각적으로 강조했다. 극장의 모든 3차원적 공간이 안무로 살아났다.
음악은 반복이 핵심이었다. 모티프가 끊임없이 도돌이 되고, 때로 반음씩 올라가며 해방을 예고한다. 리카르도 코차이언테의 선율은 힘 있고, 타악은 천둥 같았다. 다만 클로드 미셸 쇤베르그(레 미제라블)처럼 여러 레이어를 쌓아 올리는 방식이라기보다 원을 그리듯 도돌이 하는 인상에 가깝다. 그럼에도 대표곡 “Le Temps des Cathédrales”는 우아함과 비애를 품고 장대하게 솟아올랐다.
에스메랄다는 두 배우의 공연을 보았다. 한 명은 목소리가 탄탄했지만 에스메랄다의 본성을 대표하는 관능미가 부족해 뻣뻣하게 느껴졌다. 다른 한 명은 목소리가 뮤지컬적으로는 덜 다듬어졌으나 유연한 제스처와 움직임으로 무대를 장악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절제를 상징하는 플뢰르 드 리스 역의 배우는 훨씬 관능적인 에너지를 낼 수 있는 배우여서, 이번 캐스팅은 두 캐릭터의 대비를 희미하게 했다.
프롤로는 가장 설득력 있었다. 스위니 토드의 터핀보다 더 현실적인 악인이었는데. 억눌린 욕망과 도덕적 붕괴를 동시에 안고 있다. 과장된 악당이 아니라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더 섬뜩하다. 원작의 복합성을 무대가 잘 지켜냈다.
페뷔스와 플뢰르 드 리스는 불쾌할 만큼 현대적이다. 페뷔스는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자 에스메랄다를 가장 먼저 버리고, 플뢰르 드 리스는 차갑고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처형을 요구한다. 고딕 시절의 괴물이 아니라 도덕적 무감각이 주는 공포를 느끼게 했다.
두 여성과 페뷔스의 3중창은 하이라이트였다. 조명과 공간 배치로 두 사람 사이에 작아지는 페뷔스를 시각화해, 몸짓만으로 감정을 설명했다. 연극적 서사의 힘이 무엇인지 보여 준 장면.
콰지모도는 이 리뷰에서 늦게 등장하지만, 아마도 위고가 만든 가장 위대한 인물일 것이다. 끄는 발, 구부린 등 같은 신체 연기도 좋았지만, 더 마음을 움직인 건 내면의 순수함이었다. 순수함과 용기,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 배신에 맞선 분노. 그는 연민을 동정이 아니라 용기로 끌어냈다.
어느 순간부터 음악은 배경으로 물러나고, 댄서와 곡예가 빈틈을 다시 채웠다. 움직임은 서정적이고 도전적이며 살아 있었다. 특히 한 비보이는 파워 무브를 계속 구사해서 깊은 감탄을 이끌었다. 근육으로 쓰는 시에 가까웠다.
로마(집시)인에 대한 프랑스의 역사적 대우를 비추는 프레임은 작품에 현재성을 더했다. 베르디의 아틸라가 외부인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듯, 이 작품에서는 에스메랄다를 욕망의 대상이자 이국인에 대한 배척의 상징으로 그렸다. 자국 신화를 스스로 비판하는 태도는 오락을 넘어서는 깊이를 만든다. 문화가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랭구아르는 꼭 필요한 장식 같다. 극의 메인 줄거리에서 비껴 있지만, 작품의 숨결을 만든다. 힘 없는 시인이자 행동하지 않는 목격자. 모든 증언이 행동으로 이어져야만 흔적이 남는 건 아니라는 걸 상기시킨다.
커튼콜은 미리 준비하고 갔다. 유튜브에서 봤는데 커튼콜에서 관객이 노래하도록 유도하길래 가사도 외워갔다. 하지만 내가 처음 보러 간 날 배우들이 같이 노래하자고 독려하지 않았다. 다시 아들과 보러 갔을 때, 나는 후렴을 아들에게 보내주고 외워오라고 했다. 커튼콜에서 대성당들의 시대 노래를 하는 동안 내 뒤에서 낮은 바리톤이 올라왔다. 아들이었다. 우리는 그냥 노래를 같이 불렀다. 최고의 순간은 스스로 만들 수 있으니까.
결국 노트르담 드 파리는 뮤지컬이라기보다, 빛과 그리움과 인간의 몸으로 지은 움직이는 성당에 가깝다. 슬픔을 노래하는 기념비, 막이 내린 뒤에도 오래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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