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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Queen of Versailles

베르사유의 여왕

베르사유의 여왕은 화려한 볼거리와 안정된 연기로 과잉의 세계를 그리지만, 그 이면의 감정과 심리를 깊이 탐구하지는 않는다. 재치 있는 순간들은 있지만 서사는 미완의 인상을 남기며, 인간적 핵심은 충분히 드러나지 않는다.

202511_The Queen of Versailles

직접 촬영한 플레이빌 이미지로, 아카이브 용도로만 게재합니다

세계 초연 및 나의 관람 기록

세계 초연 연도:

2024

리뷰어 관람 연도:

2025

공연 극장명:

세인트 제임스 씨어터

202511_The Queen of Versailles
202511_The Queen of Versailles
202511_The Queen of Versailles

REVIEW

베르사유의 여왕(The Queen of Versailles)은 겉으로 드러난 풍요를 사실적으로 보여주지만, 그 내면을 깊이 파고들지는 않는다. 재키와 데이비드는 절박함이나 반항심, 두려움에서가 아니라 단지 “할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큰 집을 짓는다. 뮤지컬은 이 과잉을 조심스럽고 때로는 익살스럽게 관찰하지만, 그 이면을 탐구하는 데에는 소극적이다. 그 결과 인물들은 외부 사건에 반응할 뿐, 내면의 지형은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이 한계는 딸의 죽음 이후 더욱 분명해진다. 이야기를 뒤흔들고 욕망의 방향을 재정의해야 할 지점이지만, 슬픔은 빠르게 흡수되어 사라지고, 주인공은 변모 없이 삶을 이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딸이 생전에 반대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위해 집을 완성한다’는 명목으로 공사를 계속하겠다는 결정은 갈등 없이 기정사실처럼 제시된다. 비극적 불협화음을 그릴 수 있었지만, 사건은 표면적 처리에 머문다.

세상에서 가장 큰 개인 주택을 짓겠다는 야망이 공허한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건축, 예술, 정치—는 흔적을 남기려는 욕망으로 이루어져 왔다. 작품은 이 계보를 스치듯 암시하지만, 재키와 데이비드가 평범한 관객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인지, 혹은 우리 모두가 지닌 충동의 확대판일 뿐인지에 대한 탐구까지 나아가지는 않는다. 질문은 던지지만 대답은 없다.

그렇다고 작품이 공허하거나 무력한 것은 아니다. 볼거리는 충분하고, 재치도 간간이 번뜩이며, 배우들의 역량 역시 분명하다. 다만 이 이야기가 왜 노래를 필요로 하는지—무엇이 축적의 서사를 음악으로 전환시키는지—라는 근본적 질문은 비어 있다. 집은 끊임없이 확장되지만, 그 안의 감정적 공간은 의외로 좁다.

크리스틴 체노웨스의 목소리는 여전히 글린다를 연상케 하는 밝고 민첩하며 극적 확신에 찬 음색을 지니고 있으며, 오히려 현재의 여러 글린다보다 중심이 더 단단하게 들릴 정도다. 이것이 의도된 피상성의 표현인지, 그녀 본연의 발성인지 단정할 수 없지만, 목소리 자체는 순간 흔들림이 없다. 극본이 주저할 때도 그녀의 음색은 서사를 명확히 지탱한다. 데이비드 역시 안정적인 보컬로 작품의 음향적 기반을 다진다. 딸과 사촌이 부르는 ‘도마뱀 노래’는 소소하지만 상상력 있는 장면으로, 잠시나마 유쾌하고 현실적인 시선을 선사한다.

내면 묘사는 부족하지만 무대 연출은 그와 정반대로 작동한다. 무대는 사치의 상징과 대형 소품으로 가득하며, 물건의 축적 자체가 극의 추진력인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재키의 내면을 드러내기보다는 부를 외부로 과시하는 방식에 가깝다. 공간은 시각적으로 계속 확장되지만, 인물의 정서적 필요를 담는 그릇으로는 확장되지 않는다.

거대한 스크린을 활용해 인플루언서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재키의 온라인 영향력을 반복해서 보여주지만, 그것이 왜 그녀에게 중요한지—정체성을 움직이는 동력은 무엇인지—밝히지 않는다. 화면은 내면과 외면의 간극을 드러내기보다는 표면적 가시성만을 강화한다. 그 결과, 뛰어난 목소리와 압도적 시각적 신호들 사이에 극적 긴장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는다.
이 연출이 무력하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서사가 비워둔 자리를 시각적 정보로 보완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음에도—부, 허영, 영향력—관객이 발견하는 것은 많지 않다.

작품은 때때로 뮤지컬이라기보다 일련의 소셜 미디어 게시물처럼 느껴진다. 패스트푸드 체인, 컴퓨터공학 전공 이력, 미인대회 타이틀, 가족 구도 등 즉각적으로 인식 가능한 표식들이 등장하지만, 각각이 이야기와 어떻게 맞물리는지까지는 나아가지 않는다.

음악적 완성도는 높지만, 서사는 과잉으로 인해 집중력을 잃는다. 여러 인물과 에피소드가 강렬하게 등장하지만 곧 사라지고, 이야기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베르사유로의 여정도 매력적이지만, 누적적 전환점이 되기에는 기능이 분산된다.

물건의 풍부함을 앞세운 무대 구성은 시각적 산만함을 키운다. 재정적 몰락 장면에서도 잠시 등장했다 사라지는 사치품들, 끊임없는 설치와 이동은 관객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이는 의도치 않았겠지만, 멈추고 질문하기보다 끝없이 확장되는 세계를 반영하는 듯하다.

실시간 화면을 비추는 이동식 패널은 재키가 주목과 자기 연출에 의존하는 삶을 간단명료하게 시각화한다. 적절하게 사용될 때 이 장치는 그녀의 세계가 ‘보이는 것’의 논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 전달한다.

작품은 더 넓은 시대적 조건도 반영한다. 인정과 가시성은 이제 정서적 기반 시설이 되었고, 팔로워·조회수·반응은 안정감을 주는 지표가 되었다. 그 욕망 자체는 잘못이 아니라, 그저 존재한다. 작품은 이를 강요 없이 드러낼 때 가장 설득력 있다. 하지만 작품이 아직 다루지 않은 질문은 이것이다.

그 기반이 무너졌을 때, 무엇이 남는가?

나는 개인의 삶의 방식이 법과 도덕, 사회적 합의 안에 있다면 누구도 비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사회적 합의란 거대한 사건 이후에야 느리게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기술과 문화가 너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공동체의 판단이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일도 늘 발생한다.

기술이 인간적 교류 자체를 변화시켰지만, 교류의 본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이 공연의 한계는 정량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교류가 지닌 감정적 의미를 끝까지 따라가려 하지 않는 작품의 태도에 있다.

이 갤러리의 사진은 촬영이 허용된 경우 직접 촬영했거나, 소장 중인 프로그램·티켓·기념품을 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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