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
빨래는 경제적 어려움과 사회적 소외 속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린 한국 창작 뮤지컬이다. 작품은 무거운 문제들을 다루면서도, 따스함과 일상의 친절, 그리고 조용한 회복력을 잃지 않는다. 잔잔한 유머와 솔직한 감정을 통해, 공동체와 연결이 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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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초연 연도:
2005
재연 횟수:
30
리뷰어 관람 연도:
2008 - 2025
공연 극장명:
NOL 유니플렉스 2관
줄거리
빨래는 서울의 달동네에서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을 따라간다.
27세의 나영은 5년 전 서울로 이주해 열심히 일해 돈을 모으고, 언젠가 대학에 가겠다는 꿈을 안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열악한 언덕 위 반지하 방에서 서점 직원으로 일하며 근근이 살아가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몽골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솔롱고 역시 5년 전 일자리를 찾아 서울에 왔다. 현재는 불법 체류자가 되어 가족과 대학 진학을 꿈꾸는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한다. 처음 이웃으로 이사 온 나영을 본 순간 그는 사랑에 빠졌지만, 나영은 거리를 두며 마음을 열지 않는다.
공장에서 솔롱고와 필리핀 출신 친구 마이클은 한국어보다 먼저 욕설을 배운다. 열악한 근무환경 속에서 그는 부당 대우와 임금 체불, 강제 추방의 위협에 시달린다.
나영 또한 서점에서 고압적이고 성희롱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사장 밑에서 일한다. 회계 문제를 지적한 직원이 해고되자 이를 변호한 나영은 외딴 창고로 좌천된다. 술에 취해 귀가하던 그녀를 본 솔롱고는 다가가 부드럽게 말을 건다. 처음으로 마음의 벽을 허무는 순간, 솔롱고의 집주인이 지나가며 소동이 벌어진다. 경찰 개입과 추방을 두려워한 솔롱고는 묵묵히 폭행을 견디며 나영을 지킨다. 이 순간은 두 사람의 관계를 깊게 만든다.
나영의 주인 할매는 거친 입담 속에 깊은 정을 지닌 인물로, 중증 장애를 가진 딸을 돌본다. 어느 밤 딸이 위급해지자 다른 세입자인 희정 엄마가 병원으로 함께 달려간다. 다음날 이 세 여성은 서로를 위로하며 눈물을 빨래처럼 햇볕에 말린다는 노래를 부른다. 솔롱고가 지나가자, 그들은 빨래 바구니를 건네며 옥상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조용히 배려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희정 엄마는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하고, 주인 할매와 딸은 오랜 세월 떨어져 지낸 아들과 재회한다. 나영은 솔롱고와 함께 살기로 하며, 그는 공장에서 결코 배울 수 없었던 단어를 처음으로 입 밖에 낸다. “사랑해요.”
리뷰
빨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추민주 작가가 졸업 작품으로 집필한 대본과 가사에서 출발했다. 이후 한국 창작 뮤지컬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랑받는 작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아, 2025년에는 30번째 시즌과 20주년을 맞았다.
나는 2008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우연히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걷다가 빨래를 처음 보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극장에 들어갔지만, 공연이 끝났을 때 내가 짊어졌던 무게는 작아 보였다.
이 작품은 다양한 사회 문제를 나열했을 뿐, 해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나를 위로했다.
빨래는 21세기 초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다룬다.
1. 도시 빈곤과 생존의 비용
나영의 이야기는 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왔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고 여러 직장을 전전한다. 이는 상향 이동의 사다리가 끊어진 현실을 반영한다. 열악한 주거 환경과 저임금 노동은 도시 주변부 청년들의 삶을 상징한다.
2. 이주 노동과 차별
솔롱고를 통해 이주 노동자들이 겪는 착취, 인종차별, 법적 취약성이 드러난다. 공장에서 한국어보다 먼저 배운 욕설은 체계적 학대의 축소판이다.
3. 직장 내 괴롭힘과 성희롱
성인이 된 자신의 모든 세월을 일했던 서점에서 결국 해고되고 마는 김지숙의 경험, 부당함을 항의하다가 먼 공장으로 좌천되는 나영의 사례, 그리고 슬쩍슬쩍 당연한 듯 저지르는 빵의 성희롱은 그 당시에도,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폭력을 보여준다.
4. 보이지 않는 돌봄의 부담
장애인 딸을 스스로 돌보며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주인 할매의 이야기는 공적 안전망이 부재한 사회에서 노년 여성들이 짊어진 돌봄의 고통을 비춘다. 그녀는 자신이 딸보다 오래 살기를 바란다.
5. 이혼, 중년의 외로움, 비공식적 연대
희정 엄마는 본명보다는 ‘희정 엄마’로 불리지만, 이혼 후 경제적 이유로 아이와 양육권을 얻지 못한 채 떨어져 산다. 그녀의 남자친구는 그녀에게 자신의 가족을 돌볼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희정 엄마는 다른 세대 여성들의 버팀목이 되어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간다.
6. 일상의 의식으로 버티는 힘
빨래는 생존과 정화, 감정의 해방을 상징한다. 옥상은 고독과 연결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빨래를 함께 널며 나영과 솔롱고는 삶을 이어가고 사랑을 시작한다.
7. 사랑, 배워가는 것
솔롱고의 여정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한국에 온 후 불법 이주민이 되어, 공장에서 추방을 빌미로 임금 착취와 폭력, 저임금에 시달렸다. 나영과의 사랑은 언어와 문화를 넘어선다.
빨래는 사회 문제를 열거하면서도 조용히 사람들의 연대와 강인함을 드러낸다. 처음 관람했을 때 나는 단순히 감동받은 것이 아니라 압도당했다. 해결되지 않은 삶들이 무대 위에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위안이 됐다. 많은 문제들을 밝은 분위기로 당당하게 보여주며, 해결은 사회가 하라고 선언하는 것 같았다.
20년 동안 나는 빨래를 20회 이상 보았다. 근처에 들렀다가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극장으로 향했다. 최근 2025년 5월에 본 공연은 특히 깊이 와닿았다. 블로킹과 설정이 조금씩 달라졌지만 주제는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러 번 관람하며 찾아낸 작은 보석들이 있었다.
줄거리의 강점과 함께 빨래의 힘은 아름다운 노래에 있다. 첫 넘버인 '서울살이 몇 핸가요?'는 관객을 단번에 들썩이게 만든다. 대표 넘버 '참 예뻐요'는 솔롱고가 나영을 멀리서 지켜보며 사랑을 느끼는 장면을 표현한 곡으로, TV에서도 소개되어 널리 알려졌다. 이 장면에서 솔롱고를 받쳐 화음을 넣는 슈퍼 앞 세 사람은 곡이 지나치게 로맨틱해질 수 있는 분위기에 유쾌함을 불어넣는다. '솔롱고'는 솔롱고스(몽골어: Солонгос, 무지개)라는 단어와, 자신의 이름 그리고 몽골에서 '한국'을 뜻하는 표현을 연결하며 애잔한 감정을 자아낸다.
2막을 여는 '책 속에 길이 있네'는 빵의 자수성가를 노래한다. 서점 직원 두 명이 선보이는 맛깔나는 춤은 빵의 자화자찬과 동시에, 상사의 기분을 맞추며 살아가는 직장인의 고충을 그려낸다. 극의 클라이맥스에서 등장인물들의 어려움이 정리되는 순간에 부르는 '슬플 땐 빨래를 해'는 일상의 사소한 힘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울려 퍼지는 '서울살이 몇 핸가요?'가 무대를 채울 즈음, 관객은 모두 흥에 겨워 박수를 치고 환호하게 된다. 인생이란 결국 이런 것일까. 무대 속 인물들의 삶은 관객 자신의 것과 다르지만, 크고 작은 문제를 겪으며 일부는 해결하고 일부는 버텨내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그래서 관객은 그들과 동료의식을 느끼고, 애써 힘을 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이 작품은 단지 사회 비판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버티며 살아가는지를 보여준다. 가난하다고, 약자라고 해서 불행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무게를 지고도 살아가며, 행복을 찾는다.
서구 무대에서도 빨래는 통할까?
가능하다. 빨래는 오프브로드웨이나 창의성과 실험성을 보여줄 수 있는 소극장에서 서구 관객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 세입자의 고충, 가족 해체, 불안정한 노동은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다. Rent, Newsies, Next to Normal 같은 뮤지컬에서도 비슷한 주제가 다뤄졌다.
불법 이주 노동자라는 설정은 미국에서 다른 민감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인간적인 고통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다룬다면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빨래의 본질은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다. 복잡한 사회 문제가 얽혀 있고, 그중 일부는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규제나 법률로 풀어내기는 어렵고, 사회적 합의 역시 쉽게 도출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속에서도 인간적인 공감과 친절, 그리고 사회적 유대를 믿는 조용한 희망은 문화와 언어를 넘어선다. 세심한 번역과 섬세한 연출이 더해진다면, 서구 무대에서도 따뜻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다. 한국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전해도 충분하며, 필요하다면 무대를 해당 국가의 맥락으로 옮겨도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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