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icago

시카고
한국판 시카고는 1996년 리바이벌의 콘서트형 연출을 충실히 따른다. 3층 발코니에선 더 미니멀해 보였지만 음향은 훌륭했다. 정선아(벨마), 아이비(록시), 최재림(빌리)이 돋보였고 ‘We Both Reached for the Gun’ 복화술은 흠잡을 데 없었다. 친숙한 명곡으로 속도감 있는 유쾌한 극이었다.
Musical Reviews › Licensed in Korea › 2024
한국 초연:
2000
세계 초연:
1975
관람 년도:
2024
공연 극장명:
디큐브아트 센터, 서울
이 아카이브에 포함된 포스터는 기록 및 교육 목적에 한하여 게재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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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시카고는 한국에서 꾸준히 인기가 많은 작품이다. 예매 오픈과 동시에 들어갔는데도 좋은 좌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작은아들이 원하는 배우 조합까지 맞추려니 더 어려웠다. 이후 티켓 사이트를 계속 확인하다가 연석이 하나 보여 겨우 3층 발코니 자리를 예매했다.
무대는 1996년 브로드웨이 리바이벌의 콘서트형 연출을 따른다. 중앙에 밴드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고, 별도의 사실적인 세트나 큰 장면 전환은 거의 없다. 배우들은 무대 양옆의 의자에 앉아 있다가 필요할 때 중앙으로 들어오며, 밴드와 조명, 배우의 몸 자체가 무대를 만든다. 3층 발코니에서 내려다보니 더욱 미니멀하게 느껴졌지만, 전체 안무와 무대 구조는 한눈에 잘 들어왔다. 내가 앉은 자리의 음향도 아주 좋았다.
정선아 배우의 벨마는 안무를 정확하게 소화했고, 재즈에 어울리는 적절한 두께와 끈기를 가진 소리로 노래했다. 정선아 배우는 노래에 flair가 있어서 화려하게 부르는 편인데, 그 성향이 벨마의 퇴색해 가는 성숙미와 잘 맞았다. 두껍게 긁는 소리에도 쾌감이 있었고, 몸을 사용하는 방식도 배역과 잘 어울렸다.
특히 《I Can’t Do It Alone》이 좋았다. 브로드웨이에서 보았던 소피 카먼-존스의 벨마가 노회한 사람이 은근히 거래를 제안하고 음모를 꾸미는 듯했다면, 정선아 배우의 벨마는 조금 더 노골적으로 계산적이었고 록시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잃을 위기에 놓였을 때 훨씬 절박해 보였다. 처음에는 여유 있게 록시를 설득하려다가 점점 노래와 춤의 강도가 올라갔고, 마지막에는 거의 록시에게 자신을 인정받아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걔가, 다음은 나, 같이, 혼자선 할 수 없어’처럼 뜻은 단순하고 정확하게 번역되었는데도 “Then she'd, Then I'd, Then we'd, But I can't do it alone”과는 상당히 다르게 들렸다. 의미의 차이라기보다 영어 원문의 짧고 반복적인 리듬이 사라지면서 생기는 차이인 것 같다.
아이비 배우의 록시는 겉으로는 어리숙하지만 속으로는 영리하고 계산적인 면을 잘 살렸다. 목소리가 순하고 호감 있게 들려 처음에는 정말 천진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총을 쏜 뒤 순진한 척 남편에게 죄를 떠넘기고, 감옥에서는 마마 모튼과 벨마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다가 상황이 달라지면 태도와 목소리, 몸짓까지 금방 바뀌었다.
브로드웨이에서 본 록시가 처음에는 평범한 이웃집 여자처럼 보이다가 점차 자신의 매력을 발견하고 이용하는 쪽이었다면, 아이비 배우의 록시는 처음부터 천진함 자체를 무기로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멍청한 것이 아니라 멍청해 보이는 법을 아는 록시였다. 《I Can’t Do It Alone》에서 벨마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설득하는 동안 따분하고 무례하게 반응하는 모습도 재미있었다.
최재림 배우의 빌리 플린은 그에게 상당히 잘 맞는 배역처럼 보였다. 노래뿐 아니라 태도도 자연스러웠고, 차가운 눈빛과 돈을 말할 때의 단호함도 캐릭터와 잘 맞았다. 첫 등장부터 능글맞게 노래하면서도 자신이 무엇을 팔고 있는지 정확히 아는 쇼맨 같은 변호사였다.
《We Both Reached for the Gun》에서는 복화술 퍼포먼스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오페라글라스로 입술을 열심히 봤는데도 거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더 재미있었던 것은 록시였다. 빌리의 손에 조종되는 동안 몸 전체를 퍼핏처럼 만들었고, 잠시 풀려나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갈 때는 다시 천진한 표정과 움직임으로 바뀌었다. 두 배우의 합이 아주 좋았다.
브로드웨이에서도 빌리가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연기를 했지만,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복화술 기술 자체보다 빌리가 록시의 말을 만들어내고 록시가 그의 손에 조종되는 인형처럼 보이는 것이다. 최재림 배우는 그 기술까지 너무 잘해서 효과가 더욱 강했다.
메리 선샤인은 높은 가성을 유지하다 보니 가사를 정확히 알아듣기는 조금 어려웠지만, 노래 자체는 안정적이었다. 이 배역은 보이는 것과 실제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이용한 농담이어서 후반의 반전까지 포함하면 캐릭터 자체는 재미있었다.
에이모스는 많이 불쌍해 보였다. 화려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들이 살아남는 작품에서 혼자만 자신을 팔 줄 모르는 사람이다. 《Mister Cellophane》도 웃기기보다는 처량함이 먼저 느껴졌다. 브로드웨이에서 본 에이모스는 귀엽고 우스운 면과 불쌍함이 함께 있었는데, 한국 공연에서는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조금 더 강했다. 두 공연 모두 이 넘버에서 박수를 많이 받았다.
한국 공연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앙상블과 춤이었다. 동작의 타이밍과 선은 정확했고 전체적인 군무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카고에서는 일반적인 뮤지컬보다 앙상블 배우 개개인의 개성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보통의 뮤지컬에서는 앙상블이 장면이 끝나면 무대에서 내려갔다가 다른 배역으로 다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시카고에서는 대부분 검은색 계열의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무대 양옆 의자에 계속 앉아 있다가 필요할 때 중앙으로 들어온다. 같은 사람들이 관객 앞에서 계속 흩어지고 다시 모이면서 죄수, 피해자, 배심원, 기자 등 여러 역할을 맡는다.
이런 구조에서는 배우 한 사람씩 알아볼 수 있는 것이 공연의 재미와 연결된다. 그런데 한국 공연에서는 전체적인 실루엣과 움직임의 인상이 비교적 비슷하게 느껴졌다. 《Cell Block Tango》에서도 여성 배우들이 모두 검은색 계열의 비슷한 스타일로 보이다 보니 무대에서 흩어진 뒤에는 누가 어느 죄수였는지 바로 구분하기 어려웠다. 군무로 볼 때는 정돈되어 있었지만, 여섯 명의 서로 다른 여자보다 하나의 앙상블이 먼저 보였다.
브로드웨이에서 본 공연은 이 점이 상당히 달랐다. 《Cell Block Tango》의 여자들은 머리색과 스타일, 체형, 표정과 몸을 쓰는 방식이 서로 달랐고 무대 어디에 흩어져 있어도 누가 리즈이고, 휴냑이고, 준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같은 검은색 계열의 의상을 입고 같은 스타일의 안무를 추는데도 여섯 명의 무용수라기보다 여섯 명의 서로 다른 여자로 보였다.
남자 앙상블에서도 비슷한 차이가 있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앞에서 춤을 아주 잘 춘다고 눈여겨보았던 배우가 나중에는 배심원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 배우가 록시에게 완전히 홀려 무죄를 선언하는 것을 보고 너무 웃었다. 피해자나 다른 역할로 등장했던 배우들도 다시 나오면 금방 알아볼 수 있었고, 같은 배우가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과정 자체가 공연의 농담과 연극성을 더했다.
한국 공연의 앙상블은 상대적으로 homogeneous한 인상을 주었다. 모든 배우가 실제로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같은 검은색 계열의 의상과 비슷한 실루엣 속에서 개별 배우보다 군무의 통일성이 먼저 보였다는 뜻이다. 일반적인 군무에서는 이런 통일감이 장점일 수도 있지만, 같은 배우들이 무대 위에 계속 노출된 상태로 여러 역할을 오가는 시카고에서는 개별성이 더 선명할수록 연출 자체가 재미있어지는 것 같다.
춤에서도 차이가 느껴졌다. 한국 공연은 상당히 crisp했고 동작도 정확했다. 그러나 시카고에서는 정확성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 포시 스타일의 각진 손과 어깨, 골반의 움직임을 같은 타이밍에 맞추면서도 각 배우가 조금씩 다른 리듬과 몸의 무게를 가지고 움직일 때 특유의 퇴폐적이고 끈적한 분위기가 생긴다. 브로드웨이에서는 안무의 형태는 맞아 있으면서도 배우마다 움직임의 질감이 달랐다. 한국 공연은 선과 타이밍이 더 깨끗하게 맞았지만 그 안에서 튀어나오는 개별적인 성격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Cell Block Tango》는 힘과 정확성은 충분했지만 내가 이 넘버에서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달랐다. 여섯 명이 완벽하게 맞는 군무보다 여섯 개의 서로 다른 성격이 같은 음악 안에서 충돌하는 느낌을 기대했던 것 같다. 피날레 역시 충분한 힘으로 터졌고 주요 배우들의 보컬과 캐릭터에는 만족했다.
물론 브로드웨이에서는 1층 맨 앞 중앙에서 보았고, 한국 공연에서는 3층 발코니에서 보았기 때문에 배우들의 표정과 작은 연기를 직접 비교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가까운 자리에서 보았다면 정선아 배우는 한층 더 과감하게, 아이비 배우는 더 엉뚱하게, 최재림 배우는 조금 더 능글맞게 보였을 것 같다.
다만 앙상블이 흩어지고 다시 모이는 방식이나 전체 군무는 오히려 3층에서 더 잘 보였다. 그래서 개별 배우가 쉽게 구분되지 않았던 인상이나 춤의 전체적인 질감까지 단순히 좌석 차이로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시카고는 큰 무대 장치 없이 배우와 밴드, 조명만으로 살아가는 작품이다. 그래서 오히려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과 몸이 더 중요하게 드러난다. 한국 공연은 정선아, 아이비, 최재림 배우를 중심으로 주요 배역의 캐릭터와 보컬이 강했고 전체적인 완성도도 안정적이었다. 익숙하고 좋은 노래가 많고 주요 배우들이 잘 소화하는 작품이라 한국에서 계속 인기를 얻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이 단순한 무대 위에서 앙상블까지 한 사람씩 기억되는 서로 다른 인물로 보였다면, 시카고 특유의 퇴폐적이고 장난스러운 세계가 훨씬 더 풍성하게 살아났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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