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ddington
패딩턴

따뜻한 감성과 상상력이 돋보이는 뮤지컬. 뛰어난 퍼핏 연기와 인상적인 음악, 창의적인 무대 연출이 어우러져 가족, 친절, 그리고 서로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현재 웨스트엔드에서 가장 완성도 높은 가족 뮤지컬 중 하나다.
Musical Reviews › West End › 2026
REVIEW
런던에서 일주일 동안 뮤지컬과 연극을 관람하고 있다. 웨스트엔드는 처음 왔는데, 지금까지 본 공연들은 모두 만족스러웠지만 뮤지컬 자체는 브로드웨이 공연과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패딩턴을 관람하면서 런던에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패딩턴은 아직 웨스트엔드 사보이 극장에서만 공연하고 있기 때문이다. 1막이 끝난 인터미션 때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 한 번 더 관람할 수 있는지 찾아봤지만 이미 모두 매진이었다. 나는 올리비에상 수상 전에 예매했기 때문에 비교적 수월하게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극장에 들어가자 패딩턴 역의 붉은 역사(驛舍) 정면이 하나의 거대한 벽처럼 무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빨간 모자가 살짝 보였고, 객석 양쪽 벽까지 이어지는 스크린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면서 공연이 극장 전체로 확장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막이 오르고 그루버 씨의 골동품 가게 ‘Mr. Gruber's Curiosities’ 장면이 펼쳐졌다. 이어 붉은 집업 후디를 입은 James Hameed가 등장했는데, 첫 소절부터 목소리가 정말 좋았다. 잠시 후 퍼핏 패딩턴이 함께 등장했고, 둘의 완벽한 호흡을 통해 그가 패딩턴의 퍼핏티어와 보이스 액터를 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James가 무대를 떠나자 퍼핏 패딩턴만 남아 자연스럽게 극을 이어갔다.
이 작품은 패딩턴의 연기와 목소리의 조합이 완성도를 결정한다. 몸 연기를 맡은 배우(Arti Shah), 퍼핏의 섬세한 표정 조작, 그리고 목소리를 담당한 배우가 하나의 캐릭터를 완성해 냈다. 패딩턴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면서도 예의 바르고 신뢰가 가는 주인공이었고, 대사의 목소리도 무척 따뜻했다.
무대는 양쪽 벽을 가득 채운 골동품점 소품들, 패딩턴 역의 모습, 자연사박물관에서 튀어나오는 기린과 공룡 등 거대한 동물들, 후면 스크림 투사뿐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입체적인 세트가 어우러져 있었다. 단순히 그림을 출력한 것이 아니라 가로등 등은 실제 입체 구조물을 원근감에 맞게 배치해 무대가 깊고 실제 도시처럼 보였다. 후면에 펼쳐진 런던 야경 역시 깊이감이 뛰어나 공연을 보며 밤의 템스 강변을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향도 Grand Circle까지 매우 깔끔하게 전달되었다. 후반 파티 장면에서 헨리가 전자기타를 연주하며 노래할 때는 콘서트장 같은 음향으로 바뀌었고, 저역 리버브가 더해져 객석까지 진동이 전해졌다. 말소리는 끝까지 또렷했고 모든 배우들의 가창 수준도 놀라웠다. 어느 공연이나 기대에 조금 못 미치는 가창이 한두 명쯤 있기 마련인데, 이 작품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패딩턴의 노래는 따뜻하고 젠틀하면서도 곧게 뻗는 음색이 인상적이었다. 브라운 가족은 메리의 “One of Us”, 헨리의 “Risky Business” 등 다양한 장르의 넘버를 선보였는데, 곡도 좋았고 가창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연출이 뛰어났다.
옆집 주민 타냐와 토니의 노래도 놀라웠다. 두 사람은 극의 내레이션 일부도 담당했는데, “The Rhythm of London”에서는 소울풀한 가창이 자유롭게 뻗어나가 감탄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악역 밀리센트(Victoria Hamilton-Barritt)의 “Pretty Little Dead Things”는 작품의 정점을 찍는 넘버였다. 가장 드라마틱하고 파워풀한 곡이었는데, 음원과 거의 똑같이 들려 공연이 끝난 뒤 다시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택시 운전사 Mr. Curry의 넘버는 깜찍하고 코믹했다. 밀리센트가 이름을 묻자 "Curry"라고 답했고, 그녀가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핫한 거군(That's why you're hot)."이라고 받아치는 대사나, 자신이 넘버를 끝낸 뒤 스스로를 Triple Threat라고 자랑하는 장면에서는 객석에서 큰 웃음과 환호가 터졌다. 처음에는 밀리센트 편에 서지만 나중에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패딩턴을 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비둘기를 조종하던 퍼핏티어는 쓰레기통 안에 숨어 있었는데, 가끔 뚜껑을 열고 얼굴을 내밀 때마다 객석에서 환호가 터졌다.
그루버 씨와 탐험가를 동시에 연기한 Teddy Kempner는 작품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었다. “Mr. Gruber's Curiosities“와 그 리프라이즈로 작품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고, 여섯 살 때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이민 왔다는 설정 역시 이 작품이 전하는 포용의 메시지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예전 ”Doctor Who“에서 보았던 Bonnie Langford를 실제 무대에서 처음 만났다. 그녀의 상상 속 왜곡된 기억은 유쾌했지만, 결국 헨리 브라운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화려한 상상이 아니라 평범했던 자신의 진짜 기억, 주부로 살아온 시간이었다. 그랜트와 함께한 노래와 춤, 특히 다리 찢기 장면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마지막에 "아직 늦지 않았다."며 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보며 큰 박수를 보냈다.
Lady Sloane, Mrs. Hachoo, Train Announcer를 모두 연기한 Amy Booth-Steel은 과장된 캐릭터를 능숙하게 소화했다. 만약 한국어 공연으로 번역된다면 이 미묘한 뉘앙스를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Mr. Curry가 "나는 Taxi Driver이지 Taxidermist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 영어에서만 살아나는 말장난이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다.
루시 숙모 역시 타냐 배우가 연기했는데, 후면에서 배우의 그림자 뒤로 거대한 곰의 형상을 조명으로 표현한 장면이 특히 아름다웠다. 무대 양쪽 세트를 2~3층 높이까지 세워 실제 패딩턴 역 같은 공간을 만들었고, LED 화면에만 의존하지 않고 실물 세트를 적극 활용해 무대가 더욱 역동적으로 느껴졌다. 무대 전환도 암전을 최소화하고 부분 암전으로 대부분 해결했다. 예를 들어 마말레이드 넘버 뒤에는 마말레이드 토스트 인형을 쓴 배우가 일부러 늦게 등장해 주위를 둘러보다가 "Late!"라고 외치며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는 사이 다음 장면을 준비하는 등 세심한 연출이 돋보였다.
패딩턴이라는 이름도 패딩턴 역이 아니라 Whipsnade에서 발견되었다면 그 이름을 붙였을 것이라는 농담이 나오자 객석에서는 모두 웃음이 터졌다. 영국에서는 Whipsnade Zoo로 유명한 지명이라 곰의 이름으로는 오히려 더 잘 어울린다는 점을 이용한 로컬 유머라고 한다. 나는 잠시 런던을 방문한 여행자지만, 런던 시민들에게는 이런 도시 곳곳의 이야기들이 더욱 반갑게 다가올 것 같았다. 극 중 밀리센트의 박제 계획에 맞서며 "패딩턴을 관광객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장면에서는 객석 전체가 폭소를 터뜨렸다. 지금의 패딩턴 뮤지컬이야말로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대표 공연이면서 동시에 런더너들이 자랑하는 작품이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교훈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듯한 작품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뮤지컬에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배울 점이 담겨 있다. 패딩턴은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큰 메시지 속에 가족 간의 이해와 화해를 중심 이야기로 풀어낸다.
그루버 씨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부모님이 남겨준 양철통과 그 안에 간직한 사진이었다. 그는 "This is all I have."라고 말하며 사진을 꺼낸 뒤 그 양철통을 패딩턴에게 선물한다. 패딩턴의 보물은 루시 숙모가 만들어 준 마말레이드였다. 그는 그 병을 들고 런던으로 왔고, 비상식량으로 모자 속에 넣어 둔 마말레이드 샌드위치마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동물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메리의 진짜 보물은 자신이 그린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딸 주디와 가족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가족 안에는 패딩턴 브라운도 함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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