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a Karenina

안나 카레니나
러시아 라이선스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는 시대 설명을 최소화하고 압축된 서사로 관객을 신뢰한다. 이동형 LED 무대는 인상적이었으나 딕션의 아쉬움이 남았다. 그럼에도 노출과 고립이라는 주제는 오늘의 관객에게도 유효하다.
Musical Reviews › Licensed in Korea › 2026
한국 초연:
2018
세계 초연:
2016
관람 년도:
2026
공연 극장명:
세종문화회관, 서울
이 아카이브에 포함된 포스터는 기록 및 교육 목적에 한하여 게재된 것입니다.
🔗 모든 이미지는 원 출처나 관련 기사와 연결되어 있으며, 저작권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리뷰
러시아에서 제작된 라이선스 버전의 《안나 카레니나》를 관람했다.
이 작품을 보기 전, 몇 가지를 기억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러시아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섞어 사용했고, 귀족 사회에서 결혼생활의 체면은 매우 중요했다. 외도를 조용히 하면 눈감아주기도 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공표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지녔다. 안나의 남편 카레닌은 체제의 문법에 충실한 관료로, 사회적 얼굴이 무엇보다 중요한 인물이다. 그와 대조되는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을 투영한 캐릭터다.
러시아 뮤지컬에서 이런 시대적 맥락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선택일지도 모른다. 톨스토이 고전을 장황하게 해설하는 일은 러시아 관객에게는 오히려 지루할 수 있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극을 상상해 보자. 궁중에서 발 뒤에 앉은 대비를 보면 우리는 설명 없이도 수렴청정을 떠올린다. 그러나 그 문법을 모르는 관객에게는 장면 하나하나가 해설을 필요로 한다. 이 작품은 전자를 택한다.
안나가 왜 결혼생활에 염증을 느끼는지, 왜 브론스키에게 끌리는지를 길게 풀지 않는다. 눈빛 교환, 마주르카, 사교계의 수군거림, 경마장, 그리고 “나는 그의 여자예요”라는 공개 선언까지 빠르게 이어진다. 러시아 관객에게는 이미 익숙한 서사이기에 가능한 압축이었을 것이다. 한국 사극에서 궁중 권력 구조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남편을 싫어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명령조 한 번이면 충분하고, 브론스키에게 끌리는 이유는 모든 여성이 주목하는 남자가 자신에게 저돌적으로 다가오는 장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이 드라이한 전개는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과도한 심리 해설이 없었고, 인물의 선택은 장황한 동기 대신 상황 속에서 드러났다. 톨스토이를 지나치게 친절하게 번역하지 않은 태도는 존중할 만했다.
무대는 네 개의 이동형 LED 구조물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박스형 구조물들은 장면에 따라 위치를 바꾸며 배경을 형성했고, 배치 방식에 따라 연회장, 기차역, 밀밭 등으로 공간을 전환했다. 철도원 복장의 크루가 이를 계속 이동시키며 새로운 구도를 만들어냈다. 고정 세트 대신 배치의 변화로 공간을 정의하는 방식이었다.
이 극에는 MC가 등장한다. 이는 《에비타》의 Che나 《Chess》의 Arbiter처럼 극을 설명하는 존재였고, 비극적 결말을 암시했다. 그러나 반복되는 대사는 과잉으로 느껴졌다. MC는 단순한 해설자라기보다 안나의 악몽을 형상화한 인물처럼 보였다. “돌아갈 기차표는 없다”는 선언은 한 번만 했어도 충분히 섬뜩했을 것이다. 기차 소리와 무대 장치가 이미 충분히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명이 반복될수록 잔소리처럼 들렸고, 관객을 덜 신뢰하는 연출처럼 느껴졌다.
레빈의 밀밭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남성 무용수들이 긴 낫을 들고 등장했고, 노란 LED로 표현된 밀밭은 강렬했다. 실제 농기구라기엔 과장된 크기였지만, 무대적 상징으로는 명확했다. 베옷 질감의 의상과 레빈의 편안해진 표정, 자연스러운 몸짓은 도시와 기차의 세계와 분명히 대비되었다. 무용수들은 마이크 없이 춤만 추었고, 노래는 별도의 앙상블이 담당했다. 군무는 다소 과장되었지만, 레빈이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는 점은 설득되었다.
카레닌은 비교적 따뜻하게 그려졌다. 안나가 몰래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며 마주치는 장면, 그리고 그가 아들의 침실로 들어가 아이를 안아주는 장면은 감정적으로 의도된 연출이었다. 그러나 소설 속 카레닌은 ‘좋은 아버지 되기 101’을 읽은 인물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문법과 체면 안에서 움직이는 사람이다. 안나가 그를 보지도 않고 지나쳐 나간 순간, 원작 속 카레닌이라면 분노하기보다 굳어버렸을 것이다. 그 상태로 암전되었다면 더 톨스토이적이었을지도 모른다.
키티가 안나를 용서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이 설정은 뮤지컬에서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갑자기 만나기조차 싫어하던 인물을 용서하는 장면에는 감정의 축적이 충분히 보이지 않았다.
관람 중 가장 크게 걸린 약점은 딕션이었다. 특히 안나와 브론스키의 듀엣에서는 가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음향 문제인지 비교해 보았으나, 키티와 카레닌의 발음은 명확했다. 주로 모음 처리의 문제였다. 이중모음이 과도하게 늘어지거나 단모음이 흐려지면서 텍스트 전달이 무너졌다. 이 작품은 벨팅 중심이 아니라 속삭임과 서사 전달이 중요한 구조다. 가사가 들리지 않는 장면이 적지 않았고, 감상 대신 원인을 분석하게 되었다.
안나 역 배우의 음색은 아름다웠다. 특히 아들에게 노래하는 장면이 가장 좋았다. 그러나 ‘노래가 좋다’는 것과 ‘말이 들린다’는 것은 다르다. 이 작품에서는 후자가 더 중요했다.
영미권 라이선스 작품은 한국 관객이 그 문화를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전제 위에 공연된다. 영화와 TV 드라마 등 영미권 콘텐츠가 익숙하기 때문이다. 반면 러시아 뮤지컬은 한국에서 드물다.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의 압축된 상징과 생활상이 한국 관객에게 그대로 설득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를 과도하게 설명하지 않은 선택은 매우 좋았다. 설명을 덧붙였다면 오히려 원작에 대한 모욕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나는 좋았다. 영미권 작품과는 결이 달랐고, 구조적으로 흥미로웠다. 톨스토이의 힘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레빈과 키티의 분량이 조금 더 많았다면 더 큰 균형이 생겼을 것이다. 패티의 목소리는 아름다웠지만 리버브가 지나치게 강해 가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안나가 느끼는 초라함과 갇힌 현실은 그녀를 마지막 기차 장면으로 몰아넣는다. 기차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마지막 암전까지, 운명의 감각은 명확했다.
이 이야기는 옛 러시아의 비극에 머물지 않는다. 요즘 SNS에서 감정이 폭주하듯 모든 것을 공개해버리는 행위는, 어느 시대에서든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충분히 동시대적이다. 안나를 파멸로 이끈 기차가 멈출 수 없는 근대의 속도였다면, 지금 우리를 고립시키는 기차는 멈출 수 없는 정보의 확산과 알고리즘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극은 단지 고전을 무대화한 작품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관객에게도 공감을 요구하는 작품으로 남는다.
이 갤러리의 사진은 촬영이 허용된 경우 직접 촬영했거나, 소장 중인 프로그램·티켓·기념품을 촬영한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