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d Book
레드북
'레드북'은 빅토리아 시대 런던을 배경으로, 스스로를 “야한 여자”라 선언하며 외설 소설을 쓰는 안나의 이야기를 그린다. 사회의 비난 속에서도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풍자와 음악이 법정 코미디 속에서 빛난다. 생동감 있고 상상력 넘치는 완성도 높은 뮤지컬이다.
관람 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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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연도:
2018
관람 연도:
2025
극장명:
유니버설 아트센터
줄거리 & 리뷰
줄거리
빅토리아 시대 런던을 동화처럼 재구성한 무대에서, 레드북은 서른을 앞둔 솔직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노처녀’ 안나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첫사랑을 잃고 가족에게 버림받은 안나는 직업을 전전하다가, 과부 귀족 바이올렛의 하녀로 일한 적이 있고, 그녀의 유산을 배분하기 위해 나선 그녀의 손자이자 깐깐한 변호사 브라운을 만나게 된다.
안나는 로렐라이 힐 여성 작가 모임에 합류하면서 자신의 기억과 상상을 연재 소설로 풀어내기 시작하고, 그것이 《레드북》이라는 잡지에 실린다. 평론가들은 외설적이라 비난하지만, 독자층은 소녀에서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열렬히 환영한다. 안나의 세계가 신사이자 변호사인 브라운의 세계와 충돌하면서 두 사람은 부딪히고, 티격태격하다가 예상치 못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안나는 비평가 딕 존슨의 추파를 거절하며 그를 무력하게 만들고, 분노한 존슨은 출판법 위반으로 그녀를 고소한다. 그러나 법정에서 평범한 독자들의 증언이 쏟아지며, 결국 안나의 글의 가치를 사회가 인정하게 된다. 마지막에는 명망 있는 소설가로 자리 잡은 안나가 브라운과의 사랑도 함께 쟁취한다.
(전체 줄거리는 나무위키 항목 참조: namu.wiki/w/레드북#s-4)
리뷰
레드북은 '여신님이 보고 계셔', '라이카 B612'를 만든 한정석, 이선영 콤비의 작품이다. 역사와 판타지를 섞고, 언어유희와 뉘앙스를 살리며, 귀에 남는 선율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들의 특기다. 이번 작품 역시 힘 있는 멜로디와 많은 대사가 조화를 이루며 극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간다.
이 작품은 해외 진출을 목표로 2022년 런던 코벤트가든의 세븐 다이얼스 플레이하우스(오프 웨스트엔드 극장)에서 리딩 공연을, 2023년에는 디 아더 팰리스에서 쇼케이스를 올렸다. 공연을 보면서 한 가지 분명하게 느낀 점이 있다. 영국 평론가들도 이 작품은 '레 미제라블'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국 뮤지컬이 런던에 갈 때마다 흔히 '레 미제라블'의 요소를 참조했다고 평하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대오케스트라도, 바리케이드도, 파리의 대혁명도 없다. 단지 런던 배경 위에 스크린 뒤에 숨은 밴드가 있을 뿐이다. 안나의 솔로 넘버를 에포닌의 벨팅과 비슷하다고 쓰는 평론이 나올지도 모르겠다고 예측해본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1894년 빅토리아 시대 런던에서 독립적인 여성 안나는 스스로를 "야한 여자"라고 선언하며 외설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사회는 그녀를 비난하지만 독자들은 열광하며, 그녀는 결국 존경받는 작가로 성장한다. 이야기는 역사를 과감히 비틀어 오늘날의 감각을 삽입하고, 19세기 배경 속에서 풍자적 과장을 즐긴다. 작은 설정에서도 불균형이 드러난다. 안나는 이름으로만 불리지만, 남자 주인공은 성(브라운)으로만 호명된다.
극은 유머로 가득하다. 브라운과 두 신사가 보여주는 율동 같은 걸음걸이는 빅토리아 시대 신사들의 자세를 풍자한다. 풍자의 절정은 법정 장면이다. 한 재판에서 브라운은 "사랑은 변치 않는다"는 셰익스피어 소네트 116에 맞서 사랑은 날씨처럼 변한다는 논리로 변론을 이겨낸다. 또 다른 재판에서 안나는 외설 소설 집필 혐의로 기소되지만, 독자들이 차례로 증언대에 선다. 간수의 아내는 부부관계가 살아났다고 말하고, 젊은 여인은 검사에게 세 번 더 기회를 주겠다고 하며, 판사의 노모는 남편을 떠올리며 아들을 꾸짖는다. 역사를 충실히 재현하기보다는 의도적으로 과장하여 희극적 효과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희극은 언어의 정확성에 달려 있고, 레드북은 해외에서 풍자가 이해되지 못할 위험이 있다. 안나는 죽은 연인을 "올빼미(owl)"라 부르며 울부짖는데, 한국어에서는 말장난으로 통할 수 있지만 영어에서는 올빼미가 울부짖지 않고 "hoot" 소리를 내기 때문에 성립하지 않는다. 평론가 "딕 존슨" 역시 문제다. 영어에서 두 단어 모두 남성 성기를 뜻하는 속어지만 극에서는 "존슨"만 활용해 농담이 어정쩡하다. 차라리 리처드 존슨으로 불렀다면 하나의 은유에 집중되면서도, 리처드의 약어가 딕이므로 숨어 있는 은밀한 농담이 관객을 킥킥 웃게 만들지도 모른다.
또 다른 장면에서 존슨은 안나를 유혹하며 "뮤즈, 뮤즈, 뮤즈"라 노래한다. 한국어에서 뮤즈는 그저 영감을 주는 존재로 통용되지만, 영어에서는 그리스 신화 속 여성 신을 가리키는 전통적 개념이다. 남성이 스스로를 "뮤즈"라 칭하는 것은 낯설고 어색하게 들릴 수 있다. 반복 발음 속에서 원래 영어에서는 발음하지 않는 '으' 모음이 흔들려 "뮤즈"와 "뮤자" 사이의 발음처럼 들린 것도 효과를 흐렸다. 한국 언론은 종종 지드래곤을 두고 "샤넬의 뮤즈"라 하지만, 실제 브랜드 공식 용어에서는 앰배서더라 칭한다. 샤넬이나 디올은 남성을 '뮤즈'로 지칭하지 않는다.
안나의 대사와 가사는 글자 그대로 번역하기 어려운 점이 많아 보인다. "나는 야한 여자야"는 한국어에서 도발적이지만 천박하지 않은 의미인데, 영어 번역에서는 "naughty girl"은 너무 가볍고, "sultry girl"은 직설적이며, "daring girl"은 밋밋하다. 어떤 표현도 뉘앙스를 온전히 살리지 못한다. 아마도 영어로 공연한 쇼케이스에서는 전체적으로 뉘앙스를 살리면서 전반적으로 가사를 손봤을 것이다.
나는 옥주현 배우·송원근 배우 캐스트, 민경아 배우·김성식 배우 캐스트 두 차례 공연을 관람했다. 옥주현 배우는 성숙하고 위엄 있는 안나를 보여줬다. 그녀가 부른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은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을 연상시키듯 강렬하고 단호했다. 반면 민경아 배우의 안나는 프레이징이 유려했고 젊고 신선했으며, 같은 넘버에서 안나의 성장 과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송원근 배우의 브라운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오페라의 유령'에서 라울, '고스트 베이커리'에서 유령 역으로 보았던 그답게, 이번에도 장점이 잘 드러났다. 대사는 자연스럽고, 노래는 음색에 잘 맞았으며, 작은 안무까지 능숙하게 소화했다. 라울 역처럼 강력한 성량을 요구하지 않아 노래·연기·코믹 타이밍을 균형 있게 보여줄 수 있었다. 김성식 배우는 프리뷰 기간에 다소 긴장한 모습과 발음 문제('ㅅ'이 'th'로 흐려짐)를 보였으나 공연이 지속되면서 긴장감이 풀릴 것으로 보인다. 민경아 배우 역시 초반에는 약간의 발음 흔들림이 있었지만 극장 음향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목도 해외에서는 난관이다. 한국에서 빨간책은 곧바로 외설 소설을 의미하지만, 영어에서 Red Book은 정치, 회계, 혹은 마오 주석 어록을 떠올리게 한다. 해외 관객을 설득하려면 부제를 붙이거나 제목을 손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과장과 풍자가 잘 통한다. 공연은 활기차고 재미있으며, 여성 자존감을 북돋는 음악이 힘을 실어준다. 영국 관객은 두 갈래로 반응할 수 있다. 한국식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유쾌한 역사적 변주를 받아들이며 웃어넘길 수도 있고, 빅토리아 시대 고증을 가볍게 여겼다고 불편해할 수도 있다. 영국 극장 역시 풍자와 멜로드라마로 가득하지만, 레드북이 영국 무대에 어필하기 위해서는 올빼미 은유, 평론가 이름, "뮤즈"의 사용 등 몇몇 요소는 손질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을 제외하면, 작품의 가장 큰 자산인 음악이 국경을 넘어 울려 퍼질 수 있을 것이다.
극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 1막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작품도 많다. 그러나 레드북은 역사적 맥락을 군데군데 적절히 흩뿌려 관객을 과부하시키지 않는다. 좋은 음악과 유머가 어우러진 이 작품은 충분히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해외 무대에 선다면, 제작진이 문화적 뉘앙스를 세심하게 다듬어 줄 것이라 믿는다.
많은 비판적인 점들을 지적하게 되어 아쉽지만, 공연 자체는 정말 즐겁게 보았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디테일도 잘 쓰였으며, 무엇보다도 음악이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 앙코르 감상
리뷰를 쓴 뒤, 세 번째로 레드북을 다시 찾았다. 노래들이 너무도 매력적이어서 계속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 완성도의 비밀은 놀랍지 않다. 이 작품의 작가·작곡가 콤비는 이미 여신님이 보고 계셔와 라이카를 만든 바 있다. 나 역시 라이카를 관람했는데, 대표곡 ‘One Zero’를 비롯해 귀에 남는 노래들이 있었다.
레드북의 노래는 들으면 들을수록 더 짜임새 있게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기억에 남을 만한 넘버가 한두 개가 아니라, 재치 있고 코믹하면서도 기발하게 구성되어 있다. 오프닝 곡 *‘난 뭐지?’를 예로 든다면, ‘나머지’와 ‘난 뭐지’라는 말장난을 통해 재치 있게 자기소개를 풀어내며, 진지함에서 코미디로, 다시 자기 성찰로 자연스럽게 변주된다. 이처럼 가사와 선율의 조화가 돋보이는 곡들이 많아, 공연을 다시 보게 만드는 힘이 된다.
이번에는 안나 역의 아이비 배우와 브라운 역의 지현우 배우의 공연을 보았다. 이로써 주요 배우들의 캐스팅을 모두 경험하게 되었다. 배우이자 밴드 더 넛츠의 보컬로도 알려진 지현우 배우는 연기와 노래를 균형 있게 보여주었다. 특히 코믹 타이밍이 탁월해 언제 멈추고 언제 밀어붙여야 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작은 움직임에도 객석의 웃음을 이끌어냈다. 아이비 배우의 안나는 강력한 성량으로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을 웅장하게 불러냈다. 옥주현 배우의 안나가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을 떠올리게 했다면, 아이비 배우의 안나는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와 더 가까웠다. 드라마틱하면서도 어려움을 경험한 숙련된 기운을 품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모든 안나 배우들이 뛰어난 가창력을 지니고 있지만, 이 배역은 단순히 노래 실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꼈다. 무엇보다도 젊음의 순수함이 필요하다. 경험이 없는 안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른 채 무모하게 도전하고, 그 불확실함 자체가 빛난다. 반대로 노련한 여인이 한계를 이미 알고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면, 무모함보다는 세상에 지친 듯한 기운으로 비칠 수 있다. 이러한 차이는 미묘하지만 이야기에 변화를 주며, 그래서 나는 성숙한 느낌의 안나 보다는 순수한 패기에서 비롯된 대담함을 가진 안나를 보고 싶다.
인상 깊었던 코믹한 순간이 많이 있었다. 로렐라이 언덕 장면에서 브라운이 안나에게 사랑을 깨닫고 나갈 때 로렐라이가 그의 모습에 감탄하는데, 바이올렛은 그것을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감탄으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로렐라이는 브라운의 ‘여장’을 칭찬한 것이었다. 지현우 배우의 외형적 여장은 키가 크고 누더기 같은 망토뿐이라 설득력이 부족했지만, 여자 목소리를 내며 이 장면의 유머를 완성했다. 이는 배우가 의상보다도 목소리의 색채를 통해 웃음을 끌어낸, 극장의 작은 묘미였다.
회전 비슷하게 관람을 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레드북의 극본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레드북은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만든 극이므로 특히 문화적 수정이 필요하다. 작품의 배경은 19세기 말 런던이기 때문에, 한국 무대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유머가 영국 무대에서는 혼란을 줄 위험이 있다. 특히 문화적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며, 특히 언어적 말장난은 그대로 옮기기 어렵다. 그러나 세심한 조율만 이루어진다면, 이 작품의 가장 큰 무기인 노래가 국경을 넘어설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근래에 본 공연 중 노래가 제일 좋았다. 이번 관람 후에도, 공연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보기 위해 이미 표를 예매해 두었다.
🌀 또 한 번의 관람
레드북의 2025년 서울 공연 종료 전, 다시 한 번 극장을 찾았다. 이 작품의 넘버들은 최근 한국 창작 뮤지컬 가운데에서도 특히 뛰어나다고 느꼈고, 무엇보다도 라이브로 듣는 노래가 그리웠다.
이번 공연에서는 민경아 배우가 안나 역을, 지현우 배우가 브라운 역을 맡았다. 두 배우의 해석은 물론 노래와 춤 모두에서 만족스러웠다. 민경아 배우는 맑고 투명한 음색과 정확한 연기를 바탕으로 다양한 작품을 소화하는, 현재 한국 뮤지컬 무대를 대표하는 배우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 그녀의 안나는 관능적이면서도 순진한 인물로,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미소와 함께 무대 위를 유영했다. 지현우 배우 역시 다시 한 번 좋은 가수라는 인상을 남겼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쌓아온 경력, 그리고 기타 연주자라는 이력에 비추어 보았을 때 더욱 인상적이었다. 특히 과도한 스포트라이트가 없는 장면에서도 무대 위에서 편안하게 호흡하는 모습이 좋았다.
이번에는 오페라 글라스 없이 관람할 수 있도록 오케스트라석 중앙 앞쪽 자리를 예매했는데, 옳은 선택이었다. 지난 여러차례 관람보다 소리가 훨씬 또렷하게 들렸다. 잔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어서 자음이 다소 흐려지고 앙상블 넘버는 따라가기 쉽지 않았지만, 그 덕분에 민경아 배우의 맑고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발성이 더욱 도드라졌다. 솔로 넘버에서는 모든 배우의 소리가 명확하게 전달되었다.
더 이상의 상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의 노래들은 정말로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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